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의 동학농민운동( 동학운동 : 東學運動)
동학혁명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全琫準)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교조신원운동의 묵살,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된 혁명이다.
이 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구조에 대한 농민운동으로 확대되어 전라도·충청도 일대의 농민이 참가하였으나 청·일 양군의 진주와 더불어 실패했다.
동학농민운동의 결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일본 세력을 점점 더 깊이 침투 시키게 된다.
혁명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 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윗 글은 인터넷 백과사전에 동학혁명에 관해 나온 글이다.
동학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농민들에 의한 혁명이었다. 혁명초반에는 농민군이 관군과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해 조선조정과 협의 아래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해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시대 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혁명 후반에는 아직은 봉건주의 잔재에서 완전 벗어나지 못했던 지도자의 유교 성리학적 한계와 청일 외세 군대의 조선 진주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1894년이 아니고 시간을 조금 더 앞 당겨 동학혁명이 일어났거나 외세 개입이 없었다면....
지도자들의 성리학적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반봉건, 반전제 기치를 내걸고 조선을 패망시키고 농민들을 위한 새로운 나라 건국에 동학농민군 모두가 나섰다면....
구한말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만해도 가슴이 뛰는 조선후기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쩌든 결론적으로는 당시에는 처절하게 실패한 동학혁명으로 본격적으로 들어 가 보자.
그러나 당시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우리 역사정신에는 가장 큰 승리를 가져다 준 당시 대다수 백성들인 농민에 의한 자발적인 혁명이었다는 것은 잊지는 말자!
동학혁명의 시작은 농민의 항쟁이 언제나 그랬듯이 탐관오리의 무자비한 착취에서 부터 시작된다.
동학혁명 발생 이전에 조선조정은 1864년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신원과 포교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다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에 민씨 정권은 흥선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한양으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려 한다고 생각해 동학교도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도 흥선대윈군의 권력에 대한 노욕이 문제였다.
한편 1892년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이가 군수로 취임해왔다.
조병갑은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연 조두순의 서조카였다.
조병갑은 서자 출신이었지만 풍양조씨 가문덕택에 고부 군수로 취임한다.
조병갑은 군수로 취임 하자 마자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다.
무고한 농민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농민들에게는 가차없이 형별을 가 하였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다.
그 저수지들의 물값으로 농민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물세를 책정하여 받아 냈다.
또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다.
조병갑은 그것도 부족하여 주민들에게 갖가지 어처구니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 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한다.
조병갑은 조선의 탐관오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악랄하게 돈을 긁어 모은다.
이렇게 긁어 모은 돈 일부를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 뇌물로 바쳤다.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들이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때문에 조선조정의 중앙관리들은 농민들의 원성을 뻔히 알면서도 탐관오리들의 불법행위를 모른 체 한다.
이러한 일은 고부 농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는 조병갑 개인적인 지나친 탐욕도 문제이기도 했지만 매관매직이 일상화 된 당시 조선조정의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고부 농민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알게 된 조병갑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도리어 그들을 핍박하고 학정을 더 심하게 했다.
이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조병갑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조병갑은 전봉준 일가를 잡아들인다.
전봉준 아버지 전창혁은 조병갑에 잡혀가 심하게 매를 맞고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는다.
후에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기 되는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 당시 남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전봉준은 한 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동학군과 흥선대원군과의 밀계설이 계속 제기 되었다.
명성황후 측에게는 흥선대원군과 동학교도들의 밀약설은 동학교도를 탄압하는데 좋은 빌미가 된다.
이어 전봉준과 고부 농민들은 전라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관찰사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이에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하고 동학도들에게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근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봉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조병갑을 이어 고부군수로 발령받은 자들이 계속 다른 곳으로 재발령되거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임명되었다.
학정에 대한 반발로 쫒겨나다시피 한 조병갑을 다시 고부로 발령 내는 것은 당시 조선 조정의 인사 조치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와 그 난맥상을 적라하게 보여주는 조치였다.
이처럼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조병갑을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 전봉준과 고부 일부농민들,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한편 동학 지도자들은 1893년 말부터 1894년 1월 초,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남접의 최고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고부 조병갑의 무자비한 학정을 직접 겪은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조선의 백성으로서 어차피 피해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 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라고 손화중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쉽게 승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손화중은 "아직은 시기 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됩니다"하고 전봉준을 설득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직전 거사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더 큰문제는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은 남접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이 '개남국왕설' 등이 시중에 떠돌고 전봉준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했다는 밀약설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후에 김개남은 전봉준의 '존왕양이'(왕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자! )에 대해서 반대했고 조선을 패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며 전봉준과 각을 세운다.
북접의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은 계속 조정과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만을 펼치고 있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조병갑의 고부군수 재취임에 반발한 전봉준과 고부 농민 중심으로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고부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조선 조정과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동학농민운동의 횃불이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