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辛亥革命)의 역사적 배경과 결과
청나라 조정은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지만 개혁을 하기 위한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때문에 간선철도를 국유화하고 그것을 담보로 외국으로 부터 차관을 얻으려 하였던 것이죠,
하지만 간선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폭동이 쓰촨성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신식군대가 우창에 집결하고,,,
이 군대 안에서 활동하는 혁명파에 의해 혁명파에 동조하는 병사가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혁명계획이 누설되면서 혁명파 지도부는 도망하였지만 혁명파 병사들은 1911년 10월10일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청군은 총독이 도망하는 등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고, 이런저런 사이에 우창은 혁명파가 지배하게 된 것이죠,
너무나도 의외의 승리기 때무에 혁명을 이끌어줄 지도자 조차 없던 상태.
그래서 신식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여원홍이 지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영문도 모른체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 후베이성이 독립을 선언하자 후베이성을 포함 14개성이 잇따라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이들 성 모두는 혁명파가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며, 성들마다 내부적으로 격렬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여원홍에게는 이런 내분을 해결할 만큼의 힘이 없었습니다. 이때 혁명파들 사이에서는 청나라 조정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신정권을 수습하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청나라 군사 지배권을 가진 위안스카이가 등을 돌리게 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에 타격을 주고, 그와 동시에 군사력으로 혁명파를 통합할 수 있다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이때 쯤 쑨원이 귀국했는데, 신해혁명이 일어났을때 쑨원은 중국에 없었고, 쑨원은 혁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을 돌아다니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혁명이 일어난지 이틀 후의 일이었죠,
쑨원은 그래도 미국에서 자금 모금을 계속하였고 유럽까지 돌고난 뒤 12월 12일에 홍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쑨원이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으니 분명히 많은 자금과 군함을 데리고 돌아왔으리라는 기대가 한껏 고조된 분위기였지만 쑨원은 귀국 후 가진 연설에서 '가지고 돌아온 것은 혁명정신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혁명파 내에서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쑨원이 수습해 주리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쑨원에게 지도권을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의 측근 중에는 이런 혼란의 시기에 지도권을 손에 넣어 봤자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광저우에서 다시 군대를 양성해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반대 의견을 누르고 난징에서 열린 각 성들의 대표들의 선거에서 17개 성중 16개의 표를 얻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1912년 1월1일, 마침내 중화민주의 건국을 선언하고 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되게 됩니다.
쑨원은 강력한 군사독재정권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임시정부는 의회제 민주 체제를 취했고, 쑨원은 임시대통령인 자신의 권한에 제한을 받는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한편,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남북, 즉 베이징의 청나라와 난징의 중화민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 열강에게 침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권력이 제한된 쑨원으로는 두 정부의 통일을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으로 보았으며
위안스타이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2월 12일에 선통제 푸이를 퇴위시키고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