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소금행진_ 비폭력불복종운동의 상징적인 행동
1930년, 간디는 갑자기 소금세법을 어기는 행동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는데요,
인도에서 소금은 전매제라 아무렇게나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930년 3월 12일, 도장에서 출발한 간디와 제자들은 무려 360km나 이르는 단디해안까지 '소금행진'을 진행합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출발하여 행진을 하는 도중 간디는 마을에서 연설을 하여 사람들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4월 6일, 간디는 소금세법을 어기고 직접 소금을 만들며 인도 전역에서 다시 간다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자 호소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간디는 다시 체포되는데,, 영국은 인도의 대표를 런던으로 불러 제1회 원탁회의를 열게 되지만 국민회의파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도총독은 간디를 석방하여 교섭에 들어가고,,,, 간디는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중지하고 제2회 원탁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당시 간디의 행동에 실망한 사람도 많았는데, 간디는 지지자들을 반영운동에 결집시키면서도 그 운동이 고조되면 그것을 갑자기 배반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는 하였습니다.
그의 종교적 이념에는 모순되지만, 간디는 정치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계산에 의해 행동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1935년에는 새로 제정된 인도의 통치법은 간디와의 협정이 실현된 듯한 내용입니다.
즉, 주 단위로 치른 선거에 의해 인도인 내각이 성립된 것입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때, 영국의 인도총독은 인도인과 의논도 하지 않고 참전을 결정하면서 국민회의파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무슬림연맹은 영국에 협력하여 1940년 라호르대회에서 인도와는 별도로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국민회의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모든 영국인은 인도에서 떠나야 한다'는 결의를 하면서 대부분의 지도자가 체포되게 됩니다. 하지만 대중운동으로서의 반영운동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진행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