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업적과 그의 생애에 대한 간단요약
마하트마 간디는 1869년 구자라트 지방 카티아와르반도의
포르반다르라는 토호국의 상인 카스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인 카스트에 속했었지만 간디의 아버지는 조부에 이어 토호국의
재상을 맡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봄베이에서 공부하고 1888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1891년에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인도로 귀국하였는데요, 또한 의뢰받은 소송 사건을 위해 1893년에
남아프리카로 건너가게 됩니다.
인도 상인들은 유럽인의 진출로 타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인도양 주변에서 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인 구자라트주 줄신의 무슬림 상인이 간디를 고용했던 것입니다.
당시 간디는 머리를 빗어 넘기고 콧수염을 길렀으며, 정장에 넥타이를 맨 점잖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이 차별받는 모습을 몸소 체험하게 되는데,,,
일등칸 기차표를 샀음에도 인도인이기 때문에 화물칸으로 옮기라는 차장의 말을 듣고 항의하자
차장은 간디를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 쳤던 것입니다.
간디의 옷은 진흙으로 더럽혀졌고 그의 자존심도 상처를 받았을것입니다.
이 것을 계기로 간디는 민족 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인들이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는데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인도인들의 이민을 유도하였다고 합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계약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07년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8세 이상의 인도인들에게 지문 등록을 의무화하는 법안에 대해 그의 운동 방식인
비폭력불복종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는데, 이 운동을 '사티야그라하'라고도 합니다.
이 뜻은 '진리 파악'을 의미하며, 간디의 운동이 힌두교의 종교적 이념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와 그의 동지들은 지문 등록에 반대하가 감옥에 갇혔는데, 지문 등록을 거부하고 죄를 인정한 인도인들도
계속 체포되어 요하네스버그 형무소는 인도 죄수들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총독이 간디와 교섭하여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간디가 그 타협안을 받아들이자 인도인들이 석방됐지만, 총독은 약속을 어기고 더욱 엄격한 법률을 성립합니다.
그러자 간디와 동료들은 등록증을 소각함으로써 상의를 표했는데 다시 유죄를 인정하고 형을 받은 인도인들로
형무소가 또 다시 가득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비폭력불복종운동은 악법을 위반한 뒤에 죄를 인정하고 형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행함으로써 결국 그 법이 악법이라는 사실을 호소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