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배수진(背水陳)의 뜻과 유래, 그리고 역사이야기
背:등 배
水:물 수
陣:진칠 진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으로 앞에는 적이 있고, 뒤에는 강이 있으니,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임할 때 쓰는 표현이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로, 오랜 원정을 거듭해 조나라 보다도 전력이 떨어진 한신(韓信)의 전술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나라 유방(劉邦)이 제위에 오르기 전 , 한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은 유방의 명령에 따라
위(魏)나라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병사 수 만명을 이끌고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군사 20만 명을 동원하여 한나라가 쳐들어 올 길목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조나라의 군사전략가 이좌거(李左車)가 재상인 진여(陳餘)에게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한나라 군사를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기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진여(陳餘)는 이를 묵살해 버렸다.
이 정보를 입수한 한신은 기병 2천 명을 조나라가 쌓은 성채 바로 뒤편에 매복시켰고,
한신은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조나라 군사가 우리를 쫓아 성에서 나올 것이다.
이때 조나라의 성을 점령하고 깃발을 꽂아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신은 병사 1만 명으로 하여금 정경의 입구에서 나와 배수진(背水陳)을 치게 하였고,
이에 조나라 군사는 이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조나라 군사가 성에서 나와 한나라군을 공격하자 한신은 거짓으로 배수진(背水陳)까지 후퇴하였다.
여러차례 접전을 치르면서 기세를 제압하였다고 판단한 조나라 군대는 한신을 맹렬히 추격하였고,
배수진에서 한신의 군대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이 무렵 매복시킨 한신의 군대는 텅 빈 조나라의 성채를 점령했다.
결사적인 항전에 지친 조나라 군대가 견디지 못하고 성채로 돌아와 보니 성채에는 이미 한나라 깃발이 꽂혀 있었다.
한신(韓信)의 승리였던 것이다.
1592년 왜군이 약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은 전쟁에 대해 별다른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던터라,
왜군은 곳곳에서 조선의 군대를 물리치며 한양을 향해 진격해 왔다.
그러자 선조는 당시 함경도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립에게 마지막 교두보인 충청도 충주를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신립의 장수들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적은 우리보다 숫자가 많으니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령(문경새재) 산 기슭에 군사를 숨겼다가 적이 골짜기로 들어오면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활을 쏘면서 기습 공격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립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군은 기병이라 조령 같은 산골에서는 힘을 쓰기 어렵소. 기병이 힘을 쓸 수 있는 평지로 군대를 이동시켜야 하오.
달래강을 등지고 탄금대에서 싸웁시다."
1592년 4월 28일, 신립의 군대는 조령을 넘어온 왜군과 탄금대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그런데 신립은 곧 자신의 판단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넓은 들판에서는 왜군의 조총을 피할 방법이 없었고,
탄금대는 주변이 논인 습지라서 말의 발이 푹푹 빠져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선군은 왜군의 조총 앞에 쓰러져 갔다.
전투가 불리한 것을 알고 후퇴를 하려 했지만, 뒤에는 달래강이 자리잡고 있어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신립과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탄금대 절벽 쪽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 중 하나였던 신립의 부대는 탄금대 전투에서 힘없이 패했다.
이렇게 해서 한강 남쪽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왜군은 충주성을 거쳐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말았다.
배수진과 비슷한 말로는 파부침선(破釜沈船 - 솥을 깨고 배를 침몰시킨다),
기량침선(棄糧沈船 - 군량미를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