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아프리카 가나 대학교에서는 교정에 세워진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 없어졌는데요, 간디는 비폭력으로 제국주의에 맞섰던 평화주의자 이자, 20세기의 성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인데, 왜 그의 동상이 옮겨진 걸까요? 그 이유는 가나 대학교의 학생과 교수들의 청원 운동 때문이라는데, 그들은 간디가 흑인을 멸시한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 각지의 외신을 통해 전세계로 알려 지면서 간디의 실제 모습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증거
이 당시 세계적으로 큰 논란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 칼튼 대학교에서도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2018년 이 대학교에서도 간디의 동상을 철거 하자는 운동이 벌어 졌으며,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협회라고 합니다. 이들은 간디를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학생들의 이야기로는 간디는 1893년부터 191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머물렀는데 이때 그가 흑인을 멸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간디가 한 말은 '흑인들은 나태하고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며 소를 모아 부인을 사는 것이 유일한 꿈인 미개한 존재'라고 햇다는 겁니다. 간디의 흑인 비하 발언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간디의 친손 마저도 "할아버지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간디와는 크게 달랐던 것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는 사건 이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생을 알아보자
간디는 비교적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대학에 입한 뒤 1888년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3년 뒤에는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건너갔는데, 당시 간디는 백인 정부가 인도인을 차별하자 대규모의 시위를 주도한 덕분에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유명 인사가 되었죠, 하지만 이 때 보여준 간디의 행동을 순수하게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백인 정부가 흑인을 상대로 한 차별 행위에는 너무 무관심 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보였는데, 1899년 보어 전쟁이 터지면서 간디는 영국군으로 참전하였고 영국 정부로 부터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죠, 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간디는 군인의 신분으로 인도인 모병에 적극 나섰는데, 인도 청년들에게 '영국을 위해 싸우자'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공을 인정 받아 간디는 영국에게 또 한번의 훈장을 받게 됩니다.
1919년 '암리차르 학살' 사건으로 간디는 새로운 인물로 변신한다
이렇게 영국의 식민지를 보내면서 영국을 도왔던 간디는 1919년 한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바로 이 1919년에 영국 군대가 식민 지배를 반대하는 인도인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이때 수백명의 인도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이 '암리차르 학살'입니다. 이때 간디의 나이는 50세로 나이가 무색하게도 이때부터 인도의 독립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비폭력, 불복종 독립 투쟁으로 모두를 이끌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간디에 대한 이미지는 바로 이때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1924년부터 인도국민회의를 이끌었는데, 인도국민회의는 인도의 완전 독립을 선언하고 1830년에는 영국의 소금세 신설을 반대하면서 61세의 나이로 360km를 행진하기도 하였습니다. 간디는 몇 차례나 구속이 되면서도 끝까지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였는데, 1947년 마침내 인도는 영국에게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을 하였죠, 간디는 종교를 떠나 통합을 유지해야 한다고 끝까지 외쳤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과격 힌두교 단체는 간디는 이슬람교도의 편을 든다면서 비판하고 나섰던 겁니다. 이후 1948년 과격 힌두교 단체의 일원이 간디를 저격하면서 인도와 함께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게 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정말 인종차별주의자 였나?
역사라는 것은 보는 관점에서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사실 입니다. 물론, 간디 역시 젊은 시절의 행적들에서 오해를 할 만한 부분이 너무나 많은 것이죠,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인정 받고 있는 이유는 마지막 까지의 행적들 입니다, 젊은 간디가 한때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하더라고 그가 남긴 선행이 더욱 크기에, 그가 드리운 어둠 보다는 역사를 밝힌 불빛이 더 강하고 환하기 때문에 여전히 마하트마 간디는 위대한 성인으로 인정 받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