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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사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배경과 결과, 서경 천도 운동

by show쇼 2022. 9. 9.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배경과 결과, 서경 천도 운동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이 즉위한 이후 나라는 더욱 힘들어지고, 밖으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고려 침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또한 안으로는 문벌 귀족이자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의 난(1126)으로 인해 궁이 불타고 민심이 동요하던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때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을 익힌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으로 천도를 권유하였고, 묘청은 땅의 기운이 쇠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하며, 임금을 황제라고 불러 나라의 위신을 세우고,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고 나선다.

 

 

묘청의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이것을 지지하던 서경파 정지상, 백수한 등의 동조로 인종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서경에 대화궁이란 궁궐까지 짓게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인 김부식 등 개경파 문벌 귀족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치고, 또한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져 파손되고, 인종의 서경 행차 도중 폭풍우로 사람과 말이 다치는 등 천재지변이 잇따르자 서경 천도 계획은 취소되었다. 결국 서경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묘청은 1135년 자신을 따르는 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 개'라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토벌군 원수가 된 김부식은 먼저 개경의 서경파를 ㅈ거하고, 조광을 회유하면서 묘청을 죽이게 하였다. 이후 조광이 이끌던 반란군도 김부식의 관군에게 패하면서 1년 만에 묘청의 난은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