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대비)와 을사사화(乙巳士禍)
문정왕후(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조정의 실제 권력은 윤임을 필두로 한 대윤에서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 윤원형을 필두로 하는 소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자재비와 조카싸움에서 조카가 승리한 것이죠,,
문정왕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 측의 윤원형은 그 측근이었던 임백령 등을 동원하면서 대윤 측의 대표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였다고 무고 함으로써 윤임과 유관, 유인숙 등의 무수한 신료와 선비들을 사사하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회(乙巳士禍) 인 것입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겉으론 문정왕후 외척간의 싸움이었지만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으로서,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이후의 약 50년간 선비들이 대규모로 옥사한 사화는 이것으로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평안은 뒷전으로 미루고 50년간이나...
참고 : 조선의 4대사화 _ 모오사화, 갑자사화(이상, 연산군),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명종), 사림파는 4차례의 사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서원과 향약으로 선조 때가 되어서야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런 을사사화(乙巳士禍)에서 윤원형 일파인 소윤은 수년간 반대파의 숙청을 위한 음모를 계속 추진하였는데, 이때까지 죽은 유력 인사들만 해도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의 총 책임자는 바로 문정왕후였으며, 문정왕후는 죽는 날까지 국정을 장악하고 철혈정치를 펼쳤으니, 호불호를 떠나 실제로 대단한 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정왕후를 역사가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이해가 가지만 정사인 실록에서도 야사 못지않게 평가를 하는 것은 다소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이것은 문정왕후가 사화를 통해 사림을 탄압함으로써 당대 유학자들의 공공의 적이 된 부분과, 사관은 모두 유학자였던 것, 문정이 사림을 사랑했던 인종을 배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부분, 그리고 유학자들이 결사반대하는 불교를 부흥시킨 점등이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여인 이라는 이유가 더 추가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