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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사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과 인물 '베긴' '카터', 그리고 이란혁명과 원리주의(原理主義)

by show쇼 2018. 8. 29.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과 인물 '베긴' '카터', 그리고 이란혁명과 원리주의(原理主義)




1979년, 이집트의 대통령 사다트와 이스라엘 수상 '베긴' ( 1913~1992 : 폴란드 출생. 1942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지하조직 이르군을 지휘하며 영국에 저항. 1973년 리쿠드를 결성하고, 1977년 수상에 취임.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을 체결. 이집트의 사다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은 미국 '카터' ( 미국의 제39대 대통령(1977~1981). 민주당 소속으로 경제원조를 해주는 대신 인권을 지키게 하는 인권 외교를 전개하다.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을 중개했으며,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실현시킨다. 노벨평화상수상. ) 대통령의 중개로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에 조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집트의 단독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또한 PLO도 반발하기 시작하는데,,,,


그해 1월 '이란혁명' ( 1979년 이란에서 왕국 독재에 대항해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이다. 팔레비왕조는 무너지고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때, 이란의 산유량 격감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게 된다. ) 이 일어나 그 영향으로 '이슬람원리주의' ( 원리주의(原理主義)는 원래 그리스도교의 한 가지 입장에서 쓰여진 말이다. 이것은 종교상 그 종교의 본연의 모습, 즉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말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서구적인 근대화를 거부하고 이슬람교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말한다.)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 합니다.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이 원리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던 것입니다.




또한 사다트는 외자(外資) 도입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집트의 빈부 격차가 커졌으며, 그 자신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국내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81년 사다트는 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